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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 선물처럼 우리 겨레를 찾아온 이방인들] (3)대구 청라언덕의 선교사들

이은상의 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여 한국인의 애창곡이 된 ‘동무생각’에는 청라언덕이라는 공간이 등장한다. 대구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들에게조차 생명과 우정의 터전으로 각인된 이 언덕을 어떤 이들은 ‘은혜의 동산’으로 기억하며 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장소를 신비롭고 소중한 땅으로 만들어 준 주인공들은 100여 년 전 이곳을 찾아온 서양인들이었다.

동산의료선교복지회가 올해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발간한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선교이야기-한 알의 밀알 되어>에는 이 공간에서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한국인들을 섬기는데 일생을 바친 선교사 70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본지에서는 그 중 여섯 명의 인상적인 생애와 이들의 헌신으로 크게 달라진 우리네 삶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드브리지 오드린 존슨(Woodbridge Odiin Johnson·한국명 장인차)

존슨 선교사가 대구에 부임해 처음으로 세운 미국약방.

존슨은 1897년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에서 대구에 파송한 첫 번째 의료선교사였다. 부임 초기 ‘미국약방’ 개설에 이어, 1899년 대구 제중원을 열며 시작한 진료활동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으로 이어졌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 그가 진료한 환자 수는 5000명을 넘어섰다.

매일 같이 격무에 시달리며 건강이 나빠지는 상황에서도 존슨은 최초의 제왕절개 수술 집도, 한국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의학교육, 한영중일 의학사전 편찬, 한센병 진료소 운영 등의 업적을 쌓으며 경상도 내륙 일대의 의료환경을 크게 개선시켰다.

남문 안에 있던 선교센터가 성문 밖 동산, 즉 지금의 청라언덕으로 옮겨지고 이곳에서 제중원이 동산의료원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 존슨의 공헌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미국 미주리주의 한 육묘장에서 얻어와 집 근처 텃밭에 심은 사과나무는 무성하게 번식했다. 그렇게 이 땅에 전래된 사과가 나중에는 ‘대구사과’라는 브랜드를 얻을 만큼 명물이 되어 수많은 이들을 먹여 살리기도 했다. 지금도 청라언덕에는 대구 최초 사과나무의 후손이 자라는 중이다.

▲마르다 스콧 브루언(Martha Scott Bruen·한국명 부마태)

마르다 스콧 브루언 선교사가 세운 신명여학교에서 실습 중인 학생들.

자신의 동창생인 헨리 먼로 브루언과 1901년 결혼한 직후, 마르다는 이미 3년 전부터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남편을 따라 대구로 왔다.

토론토 교육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바 있는 그녀에게는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교육 사각지대에 놓인 소녀들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대구제일교회에서 부인성경반을 맡아 운영하던 마르다는 그 무렵 선교사 사택에서 ‘바느질 교실’을 운영 중이던 존슨 선교사의 아내 이디스 파커와 함께, 여자아이들을 모아 대남소학교와 같은 내용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구경북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명여자소학교는 이렇게 출발했다.

1930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 땅의 여성들을 위해 헌신한 마르다를 향해 사람들은 ‘대구경북 여성교육의 창시자’라 칭한다.

▲아치볼드 그레이 플레처(Archibald Grey Fletcher·한국명 별이추)

플레처 선교사가 한센인들을 위해 건립한 애락원의 초창기 모습.

1909년 뉴욕선교대회에서 만난 일곱 명의 선교사 일행이 한국으로 떠났다. 그 중 유일한 남성이었던 플레처는 당초 원주로 배속되었다가, 1910년 대구로 옮겨왔다. 그리고 과로로 허약해진 존슨을 대신해 의료선교 책임자가 되었다.

의료선교사로서 플레처가 가장 마음을 썼던 대상은 한센인들이었다. 어느 겨울, 발에 심한 화상을 입고 찾아온 한센인 소년들을 진료한 일이 계기였다.

1913년 대구를 방문한 대영나환자구료회 창설자 베일리 부부의 도움으로 대구 애락원이 개원하며 동산의료원의 한센인 사역은 큰 힘을 얻는다. 무려 2000명을 수용했던 애락원에서는 환자 치료는 물론 자립과 재활을 위한 기반들까지 갖추었다. 플레처는 시설 확충을 위해 사재마저 아낌없이 바치는 열성으로 애락원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이 모습에 감명을 받은 일본 황실은 그에게 1928년 휘장을 수여하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챔니스 선교사 가족이 살던 가옥은 현재 의료선교박물관으로 활용 중이다.

▲올리버 본 챔니스(Oliver Vaughan Chamness·한국명 차미수)

챔니스가 아내 헬렌과 장남 리랜드를 데리고 미국을 떠나 대구로 온 것은 1925년의 일이었다. 챔니스는 플래처를 도와 한센인들을 돌보는 애락원 부원장직을 맡았다. 특히 축산농장과 과수원을 조성하여, 애락원 식구들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공로를 세웠다.

챔니스와 버클리대학교에 이어 샌프란시스코장로회신학교까지 나란히 다니며 선교사역도 함께 한 아내 헬렌은 동산의료원 부속 간호사양성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1930년에 구 진료소 건물에 대구영아보건소가 설립되자 아이들을 돌보고 부모에게는 분유 타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챔니스 가족이 기거했던 청라언덕의 가옥은 지금까지 그 자리에 남아 옛 주인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1989년 이 가옥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해,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의료선교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캐슬린 카운(Katherine Cown·한국명 고가련)

캐슬린 카운 선교사가 조직한 ‘고아원 순회 진료대’.

6·25전쟁이 이 땅에 남긴 커다란 상흔 중 하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아들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캐슬린은 이 아이들을 위해 머나먼 한국으로 찾아왔다. 영국선명회의 파송을 받고, 동산의료원이 고아원 아이들의 보건치료를 목적으로 세운 아동병원에 간호선교사로 부임한 것이다. 2350명의 고아들이 이 병원에서 무상으로 치료를 받았다.

캐슬린은 병원에서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만으로 자기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 고아원을 찾아가 사업을 돕는가 하면, 치료의 사각지대에 놓인 고아들을 방문해 손수 치료하기도 했다. 그가 조직한 ‘고아원 순회진료대’는 대구 시내와 인접지역에 소재한 고아원들을 일일이 돌며 진료활동을 펼쳤는데, 그 활동이 10년 이상 이어졌다.

▲존 해밀턴 도슨(John Hamilton Dawson Jr.)

청라언덕 ‘은혜의 정원’에 조성된 도슨 선교사의 묘소.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도슨은 6·25전쟁에 미 해병대 제1여단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막사 뒤에서 군인들 뿐 아니라 민간인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지켜보며, 한국의 처참한 의료상황에 가슴 아파했던 그는 귀국 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의료선교사로 돌아온다.

대구 동산의료원에 부임한 지 이틀 만에 그는 수술대에 섰다. 이때부터 매일 적어도 한 건, 많을 때는 하루 4건씩의 수술을 집도했다. 특히 그가 1966년에 제작한 고압산소치료기는 당시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연탄중독사고로부터 수많은 생명들을 지켜냈다. 대구 소재 육군병원에서 월남전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환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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