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현조 목사(IRUS 교수, 커네티컷비전교회 담임)
“두 개의 관점”
사람은 모두 제각기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이를 흔히 인생관이라 한다. 사람들이 가지는 인생관을 신앙적인 면에서 나누어 보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적인 관점의 인생관을 가졌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적인 관점의 인생관을 가졌다. 전자가 수직적 관점이라면 후자는 수평적 관점이다.
두개의 관점 중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수평적 관점이다. 수직적 관점을 가진 사람은 신적인 진리에 관심이 많은 반면, 수평적 관점을 가진 사람은 인간적인 수평적 여론에 솔깃하게 쏠리고 또 그것이 그 사람의 삶에 큰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수직적 관점보다 수평적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다. 예수님께서도 “넓은 문, 좁은 문” 교훈을 통해서 이같은 세상의 불행한 현실을 이미 지적하신바 있다(마 7:13-14).
가령, 오늘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1계명인 기독교의 기본적 진리를 주장했다가는 종종 “극우적 근본주의자”로 매도되기 쉽다. 반면에 하나님이 유일신이 아니며 예수님이 유일한 구주가 아니라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상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적인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세속 메스컴이나 학계에서 아주 폭넓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일반 사람들에게도 더 인기가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원래 기독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란 기독교의 다섯가지 근본적 신앙을 파괴하려는 인본적 합리주의 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기독교 핵심 진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일어난 신학운동이다. 즉, 기독교를 척추와 같이 지탱하는 5대 근본 교리인 1) 성경의 신적 영감과 무오류성 2) 예수님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 3)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한 대속적 구원 4)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5) 예수님의 재림 등을 확고히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바로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요즘 세속 미디어에서나 불신 학계에서는 “이슬람 극우 근본주의” 등과 동급으로 취급하면서 기독교 근본주의를 고루하고 위험한 극단주의 사상으로 비하하며 공격하고 있다.
현대 문화인류학이나 사회학에서 한 사회와 종족의 문화를 연구할 때 일반적으로 수평문화와 수직문화로 나눈다. 수평문화를 표면문화로, 수직문화를 뿌리문화로 부르기도 한다. 이 두 종류의 문화를 바다의 파도와 비교 해 보자. 고요한 바다에 외부의 폭풍이 불어오면 심한 파도가 치기 시작한다. 그 폭풍에 움직이는 파도는 주로 표면에 있는 물이다. 그러나 바다 속 깊이 있는 물은 외부의 폭풍이 몰아쳐도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한 인간과 사회도 마찬가지다. 수평문화에 젖은 사람과 사회는 인생의 외풍이 불어오면 바다 표면 물의 파도처럼 심하게 움직인다.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외풍에 쉬이 요동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외풍이란 인생의 부와 안락함을 보장하는 시험일 수도 있고, 고난을 초래하는 시험일 수도 있다. 반면에 수직문화에 젖은 사람과 사회는 바다 속 깊이 있는 물처럼 인생의 외풍이 몰아쳐와도 주관과 신념이 잘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이른바 외골수 고집이나 독선적 아집과는 성질이 다르다.
따라서, 수평문화에 젖은 사람은 요동하는 세상 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을 수 밖에 없고 수직문화에 젖은 사람은 그것에 지배를 덜 받는 내부적 주관과 신념으로 살아간다. 가령 두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은 일에 성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도우며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하기 위하여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추구하는 명예와 권력과 소유의 축적에 더 큰 관심을 두고서 일한다면 그들은 동일한 시간을 동일한 장소에서 보내지만 그들이 보내는 시간의 질과 가치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자는 수직적 관점의 소유자요 후자는 수평적 관점의 소유자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면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21세기에 살면서도 의외로 외풍에 잘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수용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 되었고, 또한 세속적 유대주의에 속한 일부 유대인들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이 그동안 많은 문제들을 파생시켜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통파 유대인들이 고생이 되어도 꾸준히 신적 관점의 삶을 살려하고 그들 나름대로 수직적 신앙을 지키려는 인생관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국내외를 통틀어 2천만도 안 되는 조그만 약소 민족에게서 세계 노벨상 수상자의 삼분의 일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냥 한갖 우연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수평문화가 범람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들이 그토록 수직문화와 수직신앙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 유대 민족의 저력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오늘날 계속 밀려오는 수평문화의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인 성경을 붙들고 수직적인 인생관을 정립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 사도도 우리에게 권면하셨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러나 우리가 수평문화를 무조건 적대시 하고 무시하며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수평문화는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평문화를 선교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촉하면서 수평문화속에 그리스도의 수직적 복음이 잘 심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곧 신자의 선교적 사명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수직과 수평의 두 막대기가 만난다.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이 수직적으로 만나고, 죄인들인 인간과 인간이 수평적으로 만난다. 거기에서 하나님과 죄인과의 수직적 화목이 이루어지고,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화해가 성사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직문화와 수평문화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안에서 만나게 될 때 거기에서 아무도 상상치 못할 구원의 이적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곧 다이나마이트와 같이 폭발력있는 “복음의 능력”(롬 1:16)인 것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