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조 목사(IRUS 교수, 커네티컷비전교회 담임)
“가장 아름다운 이름”
미 동부에는 긴 겨울이 가고 이제 새 봄이 왔다. 신록의 계절 5월은 가정의 달이요 둘째 주일은 어머니주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곧 “어머니”라는 이름일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젊음은 세월과 함께 비록 시든다 할지라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만큼은 좀처럼 시들지 않는다. 어찌 갖난 아이가 태어나서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없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통계에 의하면 한 아이가 출생하여 18세 성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가 자식에게 쏟는 시간은 약 1만 8천시간, 달 수로는 총 54개월이라고 한다. 1년중 3개월은 온전히 자식을 키우는데만 시간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수년 전에 마이클 민톤이라는 변호사가 어머니가 자녀를 키우며 가사를 돌보는 노동을 금전적 가치로 계산해 보았다. 주급이 1천2백85달러였고 년봉으로 치면 약 6만9천달러라고 했다. 하지만 자식을 키우며 돌보는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어찌 그 정도의 돈으로만 측량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시인 양주동은 어머니의 사랑을 이렇게 시를 썼다.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우리가 어머니 날이 되면 부르는 참 좋은 노래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Holocaust) 시대에 일어난 얘기다. 솔로몬 로젠버그 유대인 부부는 두 아들과 함께 나치에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 안의 규율은 엄격하고 단순했다. 신체가 쇠약해져 노동 능력이 없는 죄수는 사정없이 끌려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아들 제시는 너무 몸이 병약해져 가고 있었다. 로젠버그는 매일 강제 노동을 마치고 저녁에 수용소로 돌아올 때마다 가족들의 얼굴을 찾으며 그들의 생존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것이 규칙적인 일과였다. 그는 음침한 수용소 감방에서 가족들이 서로 껴안고 살아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또 한 날의 생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힘든 노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가족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가족들을 찾아 헤멨다. 한참 후 그는 첫째 아들 조슈아가 어두운 감방 구석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속에 그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두들겼을 때 조슈아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그에게 전했다. “오늘 제시는 아주 몸이 쇠약해서 아무 노동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간수들이 그를 끌고 갔어요.” “뭐라구??? 그럼 네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다급하게 물었을 때 조슈아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겨우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이 제시를 끌고 나갈때 동생은 너무 무서워하며 크게 소리치며 울었어요. 그때 어머니는 말 없이 제시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그들에게 끌려 가셨어요.” 눈물나는 스토리다.
어머니의 사랑은 정말 신비롭다. 성경은 이와같이 신비한 어머니의 사랑을 비유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더 신비롭고 크신 사랑을 가르쳐 준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마 23:37) 사랑하신다. 성경에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주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때로는 이와같이 깊고 깊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이 세상에는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버리기까지 하는 어머니도 더러 있다. 인간이 죄로 오염됐기 때문에, 또는 각박한 세상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종종 불신세상 문화에서는 여성의 지위를 형편없이 비하시키고 남성의 지배와 소유물로 종속시키기도 한다. 심지어 힌두교에서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고, 남자로 다시 태어나야만 환생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의 창조계획 속에는 어머니와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영예롭고 존귀한 위치에 있다. 그 역할은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함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자녀들로 잘 양육하는 사명이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올려 드리는 것이 되고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세속 정치인들과 언론, 불신 국민들, 심지어 일부 리버럴 교회들과 교인들마저 옹호하는 동성결혼은 천부당 만부당한 것이다. 동성결혼은 하나님의 창조계획 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성경적으로도 도저히 설 자리가 없는 개념이다. 동성결혼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생육과 번성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고로 동성결혼 반대를 막으려는 소위 허울좋은 “차별금지법”이란 악법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십여년 전 필자가 이태리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방문했을 때, 르네상스시대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Pieta)”라는 조각상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묵묵히 바라보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내려진 예수님의 몸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슬픔가운데 무릎에 올려 안고 있는 그 조각상이 사람들의 심금을 너무도 애잔하게 울렸었기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녀를 품에 안은 모습, 그것은 영원토록 만인의 가슴에 새겨질 최고의 명화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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