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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120주년 특별기획/ 개혁신학의 꽃으로 피어나다] (3)총신 그 이름으로 일어서다

시련으로 더 단단해진 개혁신학의 뿌리

개교 120주년을 기념해 올해 5월 14일 백남조기념홀에서 열린 감사예배.

본 기사는 <총신대학교 100년사>(총신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3) 그리고 <총신대학교 개교 120주년 기념행사 자료집>(2021)에 수록된 박용규 명예교수의 ‘총신 120년의 역사, 신앙, 평가: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총신대학교까지 1901~2021’를 기초로 삼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하여 반대하는 승동(합동) 측과, 지지하는 연동(통합) 측이 끝내 접점을 찾지 못하며 한국 장로교회는 1959년 또 한 번의 분열을 맞았다. 결국 신학교의 분열도 피할 길이 없었다. 노진현 목사(승동)와 계일승 목사(연동)가 양측의 신학교 교장 서리로 대립하며 법적 분쟁까지 벌이다가, 결국 연동 측이 남산의 학교 건물을 포기하고 태릉에 새로운 대지를 마련한 채 떠났다.

하지만 아직 교육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광중학교를 임시교사로 삼은 연동 측에서 학교의 비품과 도서 등을 옮겨가려다가, 직원과 학생들에게 제지를 당해 실패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같은 과정 속에서 일방적으로 연동 측을 지지하고 두둔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승동 측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도 이루어졌다.

연동 측이 떠난 남산에서는 남은 학생들이 신학수업을 계속 받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 당시 4·19혁명의 결과로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하면서, 총회신학교도 자리를 옮겨야 할 상황이 됐다. 남산동 소재 대한신학교 건물을 주간에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급하게 이전하면서, 잠시 더부살이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한 학기를 보낸 후, 용산의 4층짜리 건물을 얻어 다시 학교를 이사했다. 강당도 운동장도 없는 환경에서 학생들은 복도 구석에 선 채로 예배를 드려야 했고, 교수들은 몇 달씩이나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힘든 상황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시기에도 이들의 학구열기와 사명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1960년 고신 측과 교단합동이 이루어져,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가 하나 되었다가 2년 만에 교단도 신학교도 원래대로 환원하는 일이 벌어졌다. 1963년 고신 측 학생들이 부산으로 돌아갔지만, 교단합동 당시의 약속을 계속 지키고자 총회신학교는 이상근 박윤선 등 고신에 속해있던 교수들을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세워 학교를 이끌도록 했다. 이 같은 혼란의 과도기를 거듭 거치는 동안 5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맞이한 1965년, 총회는 교단 발전을 위한 3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첫 번째 신학교 건립, 두 번째 선교사 파송, 마지막 세 번째 총회회관 건립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최우선 과제이자, 이후 사업들의 성패까지 가름할 신학교 건립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학교 건립이 본격 추진됐고, 추진위원장은 41대 총회장 이대영 목사가 맡았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 그리고 기독실업인 모임인 ‘사랑의 동산’을 비롯한 개인독지가들의 헌금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바로 명신홍 목사와 백남조 장로였다.

총신 제6대 교장인 명신홍 목사는 해외에서 감동적인 행보를 전개했다. 직장암 수술을 받은 직후, 아직 치료에 전념해야 할 시기인 1963년 가을에 미국으로 떠나, 총신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1965년 3월 16일 귀국하기까지 그는 목숨을 건 강행군을 미국 전역에서 이어가며, 무려 4만 달러의 헌금을 확보했다. 그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마침내 1965년 3월 22일 학교 건물의 기공이 이루어졌다.

부산 부전교회의 백남조 장로는 자신의 사택을 건축하려던 자금 200만원을 신학교 건축헌금으로 내놓으며 모금운동에 불을 붙였다. 당시 백 장로는 따로 집이 없어 본인이 경영하던 백흥화학공업사의 공장 안 판잣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생활하던 중이었다. 그의 헌신을 바탕으로 학교건립 추진이 순탄하게 진행되며, 1966년 3월 서울시 사당동의 부지 1만8000평을 백 장로 명의로 구입할 수 있게 됐다.

건축과 함께 학제의 개편과 대학인가 작업도 순탄하게 진행됐다. 1967년 5월 4일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 인가에 이어, 1969년 12월 24일 총회신학대학의 정식 인가가 이루어지며 초대 학장으로 박형룡 박사가 취임했다. 개교 70주년을 앞둔 시점이자, 예장통합과의 분열 10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비록 그 이면에 대두된 학교 재정난으로 인해 사당동캠퍼스를 매각하고 새로운 부지로 이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여러 학교 관계자들이 퇴진하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지만 1972년 새로운 이사회가 조직되어 사태를 수습하면서 총신은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한 김희보 목사는 7개년에 걸친 건설 계획을 세우고, 기숙사와 신관공사에 착수한다. 건축위원장 김인득 장로가 앞장서 헌신하면서 연건평 400평의 기숙사가 1973년 11월 19일에, 지하 1층에 지하 5층 규모로 대강당을 갖춘 신관이 1976년 12월 27일에 각각 완공된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들이 나타나는 한편으로 신학과 외에 종교음악과와 종교교육과 등이 정식 인가를 받는 등 학제개편과 학생증원 그리고 교수들 신규 영입까지 이루어져, 내부적인 발전 기반 역시 탄탄하게 구축된다.

1975년 12월 16일부터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이라는 긴 이름을 간단명료하게 줄여 ‘총신대학’이라는 새 학교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더불어 2년 뒤에는 목회신학원 과정이 설치되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정규대학원 인가까지 이루어져 총신은 또 면모를 일신한다.

하지만 그 사이 총회 정치권에서 소위 주류와 비주류 간의 파동이 격화되고, 그 불똥이 총신으로도 튀어 교수들의 좌경화 논쟁이라는 암초를 만나게 된다. 이는 방배동에 별도의 총회신학교가 세워지는 사태를 낳았고, 1979년 제64회 총회의 분열로까지 이어졌다. 연이어 1980년에는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총신을 떠나 합동신학원을 설립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폭풍 같은 위기가 연달아 찾아왔지만 총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1980년 정성구 목사가 제10대 학장으로 취임한 직후 10월에는 역사교육과 영어교육과 보육과 등의 학과들이 신설했고, 11월에는 신학대학원 설치인가가 나오면서 오히려 총신의 위상은 더욱 커져갔다. 확장되는 학교의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1981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에 22만 5000여 평에 이르는 부지를 마련해, 이곳에 총신 양지캠퍼스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사당동캠퍼스와 양지캠퍼스 양편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시설들이 확충되고 내외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총신은 종합대학으로서 면모를 완벽하게 갖췄다. 1995년 3월 1일 학교이름은 ‘총신대학교’로 변경되고, 초대 총장으로 김의환 목사가 부임했다.

2001년 개교 100주년 기념예배에 이어, 올해 120주년 기념예배를 맞기까지에도 총신은 수많은 시련을 겪고 또 극복해왔다. 그 가운데 수많은 목회자와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한국교회에 개혁주의 신학이 뿌리내리고, 국내 최대의 교세를 갖춘 교단 총회가 형성되며, 세계 곳곳에 복음의 거점이 마련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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