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총신 120주년 특별기획/ 개혁신학의 꽃으로 피어나다] (2)시련과 투쟁의 나날들

보수신학 회복과 입지 강화 노력 치열했다

본 기사는 <총신대학교 100년사>(총신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3) 그리고 <총신대학교 개교 120주년 기념행사 자료집>(2021)에 수록된 박용규 명예교수의 ‘총신 120년의 역사, 신앙, 평가: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총신대학교까지 1901~2021’를 기초로 삼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1939년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장로교총회는 평양신학교를 계속 유지하기 원했다. 사실상 문을 닫은 학교를 다시 운영하고자, 채필근 목사를 교장으로 한 새로운 신학교가 1940년 4월 공식 개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 대한 실질적 권한을 가진 장로교공의회는 신사참배에 동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학교 운영을 허락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의 시설사용도, 서류 이양도 완강히 거부했다.

1940년 가을 총회 신학교위원회가 평양신학교 건물 임대를 공식 요청하자, 장로교공의회에서 입장을 정하기도 전에 새로운 신학교의 학생들이 평양신학교 기숙사를 점령하는 일도 벌어졌다. 결국 장로교공의회는 투표를 통해 32대 7로 임대요청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로도 평양신학교 시설을 차지하려는 새로운 신학교 측의 시도는 계속됐다.

친일활동에 앞장서던 채필근은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투옥된 주기철 목사의 사택을 빼앗아 교장 사택으로 사용하는 만행까지 저지르며, 신학교 운영을 강행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이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현 총신대학교 역시 이 학교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평양신학교 폐교와 함께, 교수직을 맡았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한국인 교수들까지 중국 일본 등지로 떠나버렸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선교사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공산치하가 되어버린 평양에서 신학교를 복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폐교 직전까지 학교를 이끌었던 라부열 선교사마저 1946년 미국에서 숨졌다.

그 사이 장로교회 안에는 다른 신학교들이 등장했다. 오랫동안 보수주의 신학에 눌려있던 자유주의자들에게 평양신학교의 폐교는 자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교를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 중심에는 미국 웨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김재준 목사가 있었다. 그의 주장처럼 서울에 세우는 신학교,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신학교라는 명분이 힘을 얻어 1940년 4월 19일 조선신학교가 개교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는 서울 동작동에 교사를 마련하고, 더욱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신학적 색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1947년 조선신학교 재학생들 상당수가 교수진, 특히 김재준의 가르침에 신학적 문제가 있다고 총회에 진정서를 보내 조사를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그 유명한 ‘51인 신앙동지회 사건’이다.

51인 신앙동지회는 진정서에서 “우리는 먼저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조선신학교의 교육이념을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근대주의 신학사상과 성경의 고등비평을 항거합니다. 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을 배척하는 것입니다”라며 강력한 항거의지를 보였다.

총회에서 구성한 조사위원회는 학교 측에 보수적인 교수진을 보강하라고 명했지만, 조선신학교는 이를 거부했다. 파국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수많은 재학생들이 조선신학교를 떠났다. 이들이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은 부산의 고려신학교였다.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1946년 설립한 신학교이다. 당초 경남 진해에서 신학강좌로 출발했다가, 부산으로 옮겨 광복동에서 학교를 운영했다. 평양신학교를 복구한다는 목표로 한 이 학교를 박형룡 목사와 박윤선 목사가 연이어 교장을 맡으며 이끌었다.

신사참배의 죄악을 청산하는 것과 칼빈주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을 모토로 삼은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한 이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여겼다. 때문에 자신들이 장로교회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인식해, 신사참배의 죄악에 대한 회개가 명백히 이루어지지 않은 총회로부터 인준을 받으려하지 않았다. 총회 역시 고려신학교 출신들을 강도사로 인허하지 않았다.

조선신학교에는 신학적 문제가 있고, 고려신학교는 총회의 인준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장로교총회에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이정로 이인석 이재성 목사의 주도로 1948년 3월 15일 대전제일교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위한 전국적인 회의가 소집됐고, 이 회의 결과 신학문제대책위원회가 구성된다.

신학문제대책위원회는 그해 4월 20일 열린 제34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개혁안이 끝내 통과되지 못하자, 한 달 후 서울 창동교회에서 모여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결정한다. 고려신학교 교장을 사임한 박형룡 목사가 초대 교장으로 선임되고, 그해 6월 일제가 세운 신사가 있던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자리에서 드디어 장로교신학교가 개교한다. 이듬해 열린 제35회 총회는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신학교로 인준한다.

박형룡 박사는 장로회신학교 신설을 기념한 특별기도회에서 ‘선지학교의 중건’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설교를 남겼다. 이 설교문에서 역설한 ‘경영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사가 되라’는 메시지는, 첫 번째 항목만 ‘신자가 되라’로 바뀐 채 지금까지 고스란히 총신의 교훈(校訓)이 되었다.

하지만 세 개의 신학교가 공존하는 상황에는 정리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1949년 합동위원회까지 구성이 되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서로의 갈등만 커진 상태에서 6·25가 터졌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열린 총회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피난지였던 대구시 대신동 283번지에 총회신학교가 개교했다. 이사장은 권연호 목사, 교장은 아치볼드 캠벨(한국명 감부열) 선교사가 선임됐다. 어수선한 시국에도 무려 519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1·4후퇴 당시 월남한 북한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큰 기여를 했다. 덕분에 총회신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신학교가 될 수 있었다.

한편 조선신학교의 폐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분열한 이들은 4년제 한국신학대(현 한신대학교)로 새 출발을 했고, 이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휴전이 이루어진 후 1953년 10월 21일 총회신학교는 서울 남산으로 교사를 옮겼다. 전쟁 전 장로회신학교가 운영되던 자리였다. 총회는 11월 첫째 주일을 신학교주일로 제정하면서, 어려운 총회신학교를 뒷받침하려고 애를 썼다. 그에 앞서 새로운 교장 선임도 이루어졌다. 박형룡 목사가 총신의 첫 한국인 교장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큰 파도가 남아있었다. 소위 ‘남산신학교 대지 불하사건’에 책임을 지고 1958년 박형룡 목사가 교장에서 퇴진한데 이어, 다음 해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로 불거진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심화되며 제44회 총회에서 예장통합과의 교단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분열 당시 신학교를 실질적으로 관장하던 교감 권세열 목사는 에큐메니칼 지지진영에 속한 인물이었다. 또 다른 위기가 시작됐다.

기독신문

조회수 1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