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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120주년 특별기획/ 개혁신학의 꽃으로 피어나다] (1)가슴 벅찬 태동, 평양신학교

숭고한 ‘전문 목회자 양성’ 사명 힘껏 지켰다

평양신학교를 모체로 태어나 대한민국의 대표 선지학교로 자라온 총신대학교(총장:이재서)가 개교 120주년을 맞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시절을 꿋꿋이 이겨왔고, 지금도 견뎌내면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총신의 역사와 그 요람에서 성장한 인물들의 면면을 되짚어보는 한편, 오늘의 성과와 과제들도 다시 생각하는 특집을 앞으로 8회에 걸쳐 마련합니다.

먼저 세 차례 게재하는 ‘테마I-역사 편’은 <총신대학교 100년사>(총신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2003) 그리고 <총신대학교 개교 120주년 기념행사 자료집>(2021)에 수록된 박용규 명예교수의 ‘총신 120년의 역사, 신앙, 평가:평양장로회신학교부터 총신대학교까지 1901~2021’을 기초로 삼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1895년은 놀라운 해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보잘 것 없었던 한국 장로교회들의 교세가 이때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세례교인 숫자는 1895년 이전까지 286명에 불과했다가 1900년경에 이르면 3690명으로 10배를 넘는 성장을 했고, 같은 기간 교회 숫자도 13개 처소에서 무려 542개 처소로 크게 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평양 의주 용천 선천 송천 등 미국북장로교 선교회에서 담당했던 지역은 엄청난 교세 확장을 이뤘다.

당연한 결과로, 폭증한 교회와 성도들을 돌볼 인력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인 성도들에 대한 교육은 사경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뽑아 ‘조사’라는 직함을 주고 선교사들을 돕도록 역할을 맡겼다.

하지만 평신도지도자들의 육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낀 선교사들은 더욱 고도의 신학교육을 통한 전문 목회자 양성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포삼열 선교사

이 부분에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미국북장로교선교회 평양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사무엘 마펫(한국명 마포삼열)은 그 중심에 있었다.

마포삼열은 미국북장로교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내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기금 지원도 요청한다. 허락이 떨어지자 마포삼열은 마침내 1901년 5월 15일 평양대동문 옆 숲막골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두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평양신학교를 개교한다.

두 학생은 마포삼열 본인이 담임목사로 섬기던 장대현교회의 장로 김종섭과 방기창이었다.

평양신학교는 초대 교장인 마포삼열을 포함한 특정 선교사나 개별 선교부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학교가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서 사역 중이던 미국북장로교선교회를 비롯해 미국남장로교선교회 호주빅토리아장로교선교회 캐나다장로회선교회 등이 결성한 선교사공회가 태동단계에서부터 함께 운영하고 책임지는 체제가 구축됐다.

평양신학교가 설립된 그 해 선교사공회는 신학교육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위원회는 1902년 신학생들을 위해 5년간에 걸친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이후 전국적인 학생모집도 이루어지며 평양신학교는 점점 체계를 갖추어간다.

초창기에는 1년 내내 수업을 하는 대신 3개월씩 모여 집중교육을 하는 형태로 교육과정을 운영했다. 나머지 9개월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독서와 자율학습을 통한 과제들이 주어졌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조짐들이 엿보이던 1906년부터 학생들 숫자도 급증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입학했던 학생들 총합보다 더 많은 수의 신입생이 입학하면서, 3개 학급에 재학생 숫자는 5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전국교회, 특히 의주와 전주 등지에서 신학생들을 위해 연보하는 움직임들이 크게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신학교 건축을 위한 5000달러의 기부금까지 답지했다.

1907년 6월 20일 드디어 평양신학교 첫 졸업생이 배출됐다. 길석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졸업생들은 그해 9월 17일 조선독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된다.

서울 용강 선천 제주 등 전국으로 흩어진 이들은 각자의 사역지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한다. 또한 평양신학교를 통해 한국인 목사들이 탄생하면서, 한국장로교회는 더 이상 외국인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함께 이끌어가는 형태로 서서히 재편된다.

같은 해 평양신학교는 조선예수교장로교공의회로부터 ‘조선장로회신학교’(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라는 공식 명칭을 얻는다. 학교의 토대가 제대로 구축되자 학생 숫자는 더욱 크게 늘어났다. 1916년에 이르면 재학생의 숫자가 도합 23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회 신학교’로 우뚝 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평양신학교는 아무나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매년 3월 소속 노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입학생들을 선발했고, 3월 입학 외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추후 입학을 불허했다.

1916년 신학교 요람에 따르면 25세 이하의 경우 입학 요건의 자격을 갖춘 대학 졸업생으로, 27세 이하의 경우 중학교 졸업생이거나 27세까지 중학교에서 공부한 자로 입학 자격에 제한을 두었다.

학사관리도 엄격했다. 각 과목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3개월 후 재응시 기회를 주었고, 여기서도 통과하지 못하면 반드시 해당 과목을 재수강하도록 했다. 결석이 1/3이 넘으면 해당 과목들을 응시할 수 없도록 했다.

입학해서 3년간 공부하는 동안 장로나 조사 직분을 수행치 못한 경우에는 4학년 진급을 할 수도 없었다. 이 정도 수준이었으니 평양신학교 출신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재들이라는 평판을 얻게 됐다.

1915년까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147명 중 대부분은 담임목사로, 이기풍 등 7명은 제주와 해외에서 선교사로 각각 활동하며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제2회 졸업생 김필수는 1915년 전주서문교회에서 열린 제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19년 일어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 중 5명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했거나 재학 중이던 인물이었다.

1918년 3월에는 평양신학교 교수회에서 경영하는 학교 기관지 <신학지남(新學指南)>이 창간된다. 장로교 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지로서, 신학교와 전국교회를 이어주는 소통의 창구로 신학지남의 역할은 총신의 역사와 함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학지남이 창간되던 그해부터 평양신학교의 학제는 5년에서 3년으로 전환되었고, 커리큘럼도 대폭 개편되었다. 한편으로는 외형적인 시설확충도 이루어졌다.

미국 시카고 맥코믹 여사의 기부금에 힘입어 1908년 5월 15일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에 한옥으로 새 신학교 건물을 완공했으며, 1921년에도 다시 맥코믹 여사의 헌금으로 현대식 새 교사를 완공해 봉헌식을 올렸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 한국인들이 신학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교수진에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유학한 남궁혁 이성휘 박형룡 등이 합류하고, 1934년 학교 이사회는 전체 14명의 이사들 중 절반 가량이 한국인들로 구성되었다. 물론 미국북장로교선교회를 비롯한 해외선교회의 물심양면 지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할 무렵, 평양신학교에도 위기가 닥쳤다. 당시 2대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스테이스 로버츠(한국명 라부열)는 그해 가을학기 개강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학교는 다음 학기에도, 그 다음 학기에도 문을 열지 못했다. 졸업반의 수업은 통신과정으로 대체되었고, 1939년 4월 13일 제34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졸업생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 평양신학교는 사실상 폐교에 들어갔다. 선교사들 대부분이 추방된 상황에서 <신학지남> 또한 폐간당하고 말았다. 기나긴 암흑기가 도래했다.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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