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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호 박사 칼럼]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

손성호 박사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이라는 것이 있다. 이 용어는 W. 리프먼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 《여론(1922)》에서 사용하였으며 현재 사회 심리학 또는 사회 과학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스테레오 타입을 “대개의 경우, 우리는 먼저 보고 나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정의를 내리고 나서 본다. 외계(外界)의 어떤 방도도 없고 떠들썩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문화가 이미 정의를 내린 것을 선택하고 문화가 유형화한 그대로 그 선택된 것을 지각하게 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전라도 사람은 거짓말을 잘한다든지, 경상도 사람은 시끄럽다든가, 법을 전공한 사람은 딱딱하다 등등. 많은 스테레오 타입은 증거도 없이 만연하고, 많은 오해와 고정관념을 낳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고치려고 하질 않는다. 생겨 먹은 것이 그러하니 나라고 별수 있어요? 자신을 낙인찍어 버린다. 스테레오 타입은 일부를 전체로 매도하고, 우리 인간의 다양성을 부정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스테레오 타입을 가지고 성경을 오해하고 있진 않을까? 대표적인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는 이것이다.

[눅 18: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영생에 관심이 많은 젊은 율법학자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할 때, 젊은이는 부자임으로 근심하며 떠나는 청년 뒤에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을 빌려 이렇게 인용하신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 약대는 가장 키가 큰 동물이고, 바늘귀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런 관용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예수님에서 나온 말씀은 모두 예수님이 만드신 말씀이므로 진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 부자 교인을 떠올리며, 은근히 그 사람의 신앙과 헌신을 무시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진짜 하고 싶은 말씀이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슬퍼하면 떠나는 이 젊은이를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다. 정말 불가능한가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람들의 통념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다’ 하시는 분이고, 이런 일은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일어난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의 반전을 보아야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많으니라. 반전이 많은 경기가 청중을 흥분시키고, 반전이 있는 드라마가 재미있는 법.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하는 말에 더 무게를 두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놓쳐버린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두 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은 니고데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대부분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요 3: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사람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하자, 답답해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들어도 답답하다. 유년 주일 학생들도 born again을 아는데.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표적들만 보았지, 그를 믿지 않았다고 판단해 버린다. 그리하여 니고데모는 다른 유대인들을 의식해서, 유대인들 저녁 시원할 때 친구와 담소하는 유대인 습관을 무시하고, 밤에 몰래 찾아왔다고 주석한다. 이런 판단이 맞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당시 누가 알았을까? 예수님의 네 제자들도 몰랐다[12 제자 임명은 1년 뒤에나 있다].

성경은 끝까지 읽어 보아야 했는데 니고데모는 처음 만난 것으로 끝나고 말았나? 아니다. 물론 만났다는 언급은 없지만 만났을 경우의 수가 훨씬 높다. 그때는 초막절 절기였다.

[요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은 초막절에 올라오셔서 성전에서 성경을 가르치시며 사람들을 초청하셨다. [요 7:37-38]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여러 표적을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갈릴리 출신이기 때문에 그를 믿을 수 없다고 씩씩거릴 때 니고데모가 끼어들어 예수님을 변호했다.

[요 7:50-52]

50 그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을 다시 만난 이 대면은 심야의 만남 이후, 28개월 지난 후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예수님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를 믿었기 때문에 자기 동료들의 반박에도 예수님을 변호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일이 있고 6개월 만에 예수님을 만나는데 예수님은 이미 시체의 몸이셨다.

[요 19:38-40]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아리마대 요셉은 시체를 달라하여 그의 무덤에 예수님을 안장했다. 니고데모는 100근, 엄청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몸에 부어드렸다. 니고데모도 훌륭한 일을 했지만 아리마대의 헌신은 더 크다. 그런데 요한은 두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잘 보아야 한다. 요셉도 니고데모처럼 관원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숨어서 따른 제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숨어 지낸 제자가 아니다.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다.

열두 제자들 조차 무서워, 하지 못하던 일을 두 사람이 해낸 것이다.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Gospel of Nicodemus라는 책이 1907년에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재판,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지옥 정복에 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잘 믿다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순교했다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마지막 스테레오 타입은 ‘네 가지 마음의 밭’이다. 여기서는 상술하지 않고 숙제로 남기고자 한다.

[눅 8:5-8]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이 처음부터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가? 아니면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네 가지 밭을 오가며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나요?

/ 필자 손성호 박사는 총신대학 종교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총신신학대학원(M. Div), 리폼드신학대학원(MRE),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석사(MRE)및 철학박사(기독교 교육 전공)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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